올해 오월에 우리는 오랜 병환으로 힘겨워하시던 아빠를 하늘로 보내 드렸다.
이제 4개월 정도가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를 보네 드리는 중이다.
그리움의 사무침에 빠진 엄마. 걱정이다.
그러나, 엄마는 self care 중이다. 강한 척, 괜찮은 척 엄마는 연기를 잘하신다.
시간이 약이리라. 그저 그렇게 믿었는데. 아닌가?.



사구제 제사상을 만들어 보신 엄마는 추석에도 아빠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시고 인사를 하시겠다고 한다.
이건 결정을 한 걸 완전히 뒤집은 건데.
사구제에 엄마는 말없이 남동생과 둘이서 제사를 지내셨다.
전을 부치고, 조기를 굽고, 탕국을 만드시고, 지방에 절을 더하여 아빠를 보네 드렸다고 고백을 했다.
그날이 지나고야 남동생은 단체톡에 인증사진을 올렸다.



아빠의 장례식 날 우리는 회의를 했다.
아빠의 제사는 제삿날에 모일 수 있는 가족과 식사를 함께 하는 걸로.
그때 엄마는 그렇게 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그 결정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남동생과 함께 사구제 제사를 지내신 뒤, 밝게 웃으시면서 모처럼 밤을 잘 잤다하셨다.
동생은 엄마에게 반주로 술을 먹였다 했다. 동생과 함께여서 더 기쁘셨겠지.
그는 아빠가 병환이 깊어 힘들어하기 전엔 일 년에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운 잘난 나라의 아들이다.

엄마는 아빠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그의 빈자리가 너무 크시구나.
사랑이 깊어 따라갈 순 없을지라도 그렇게 마음을 달래고 있음을.
혼자 있는 시간도 견디기가 어려우신 게지. 그저 짐작만 할 뿐.



말만으로 일로만 하던 사별가족 지지가 내 것이 되자 난이도가 가늠이 안될 만큼 컸다.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한편으로는 부럽다.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신 거다.

어쩌다가 얼굴만 삐쭉 봤던  나는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사 남매를 키우고, 과수원과 밭일을 하시며, 40년 아빠의 암병간호를 했다.



엄마는 아빠를 보내시고, 난 뒤부터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신다.
자신은 늘 씩씩하고 늘 자신은 건강하다 하셨다.
자신은 괜찮다가 몸에 베이신 분. 그녀는 보살이다.
괜찮다는 말을 믿진 않으나,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려 날 설득했다. 그래야 나도 살 수 있으니.
난 늘 내 일과 내 생각 속에 살았다. 난 바빠. 마음에 여유가 없다. 난 세 아이의 엄마고 워킹맘이고, 혼자다.
그녀도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그리움을 온몸으로 안은 채, 혼자 밥 먹고 혼자 우셨겠지.



외로움과의 친구 하기 그 자체. 그 느낌 알지. 난 외로움대학 10년 차다.



평소 엄마한테서 오는 전화를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결혼이나 장례 같은 큰 집안일이 있을 때다.
우리는 거의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녀와 난 말수가 없어도 너무 없다.
하지만, 아빠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4년여를 한 달에 서너 번까지 아빠의 개인비서이자, 운전사, 병원 안내자, 상담사, 간호사다.
혹은 아빠를 받아주는 요양병원을 찾아 인근 시설을 헤매는 역할을 해야 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머리에선 쥐가 나고, 운전대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온전한 내 몫.
내 연가는 모두 아빠 차지였다.
엄마는 곁에서 지켜만 보셨다. 엄마도 이젠 팔십 노인이다.



자식과 부부의 죽음을 바라봄에는 온도차가 있다.
그저 바라만 볼뿐, 엄마에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만 한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듯, 그저 그렇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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